차를 즐긴다는 것은 생활, 패션, 예술이자 문화이며, 차를 마시는 이들의 공통 언어이다. 차의 고향은 중국이며, 고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전되어왔다. 해갈 및 약용으로 쓰이기 시작하던 차는 당.송대의 자다법과 점다법의 다도법을 거쳐 명.청대의 포다법으로 그 모습을 달리했고, 찻잎 제조방법의 변화로 인해 다기의 사용법과 차를 마시는 방법도 변해왔다. 중국의 차 문화는 사신과 무역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이는 몽골과 티벳인들의 생활 속으로도 자리잡아갔다. 찻잎의 수요는 날로 증가했고, 이에 차마고도가 생겨나며 유목민족이 차를 마시는 방식과 도구도 함께 발전해갔다.
당.송대에는 일본에서 파견한 사신과 유학 온 승려, 상인들의 왕래로 인해 중국의 차 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졌으나, 일본 현지의 정신적 문화와 행차(行茶) 예절이 융합된 그들만의 엄격한 일식 다도로 발전했다. 명대 말기에는 복건(福建) 지역의 승려가 소개한 복건식 끽다법과 의흥(宜興)의 다기가 일본 문인들이 즐기던 담백한 끽다법과 어우러져 전다도(煎茶道)가 탄생했다.
명대 말, 청대 초에는 중국 동남부 해안에 거주하던 많은 이들이 이민을 떠나며 차를 마시는 문화 역시 동남아와 대만으로 퍼져나갔다. 대만은 복건과 광동 지역의 공부차(工夫茶)의 다도법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차를 즐기는 분위기 역시 예술적인 영역으로 발전시켜왔다. 《제라현지(諸羅縣志)》에는 대만 중남부에 야생 차나무가 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대만이 차 나무 재배에 적합함을 의미한다. 차 상인들이 복건 지역에서 들여온 차와 제조법을 지속적으로 개량해온 결과, 1980년대에는 고산차(高山茶)의 발전까지 일궈냈다. 고산차는 주로 대만 중.남부에서 재배된다.
전시는 위에서 서술한 내용의 맥락 순으로 이어진다. 「차의 고향—중화 차 문화」,「다도—일본 차 문화」,「차의 멋—대만 공부차(工夫茶)」의 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본 박물원의 차 문화 관련 소장 문물을 통해, 각 지역만의 독특한 끽다법과 차 문화를 담아냈다. 명대 다실과 일본 다실 및 현대 다석(茶席)등의 공간 전시를 통해 각 시대와 공간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차 마시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관람객들은 아시아에서의 차의 전파와 교류, 그리고 각 지역의 특색을 기반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어낸 차 문화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
제 1장
차의 고향—중화 차 문화
1.당.송(唐宋) 의 멋
중국의 차 마시는 문화는 그 역사가 매우 유구하며, 7세기에는 중국 전역에 차 마시는 문화가 이미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8세기에는 육우(陸羽 약733-803)가 《다경(茶經)》(761)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찻잎, 다기 및 전자다법(煎煮茶法)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기재하였고, 끽차법(喫茶法)과 다구의 사용 방법 등을 규정하였다.당대(唐代) 사람들은 팽다(烹茶)의 방식을 이용했다. 이는 먼저 찻잎을 분말로 갈아서 차솥에 넣어 끓인 후, 다완(茶碗)에 담아서 마시는 방법이다. 다완은 월요(越窯)의 청자와 형요(邢窯)의 백자가 가장 일반적이었고, 일반적으로 이를 「빙자설완(冰瓷雪碗)」이라 일컫는다.
송대(宋代) 사람들은 가루로 만든 찻잎을 다잔(茶盞)에 넣고, 다병(茶瓶)에 담긴 끓인 물을 부어서 마셨다. 이를 점차(點茶)라고 한다. 11세기의 저명한 문인 채양(蔡襄1012-1067)은 자신이 저술한 《다록(茶錄)》에서 차는 색, 향, 맛을 겸비해야 한다고 언급하였고, 9종류의 다기를 소개했다. 이 중 후대까지 전해진 송대 다기는 다잔(茶盞)과 차탁(茶托)이 비교적 일반적인 편이다. 송대 사람들은 투차(鬥茶) 또한 매우 즐겼는데, 그 방법은 차에 거품을 내서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차 거품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검은빛의 다잔(茶盞)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청, 백색의 다완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2.명대 문인들의 아집(雅集)
당.송 시대에는 찻잎으로 차병(茶餅) 혹은 단차(團茶)를 많이 만들었고, 이는 운송에 용이했다. 그러나 명 태조(太祖) 홍무(洪武) 24년(1391)부터는 단차의 진상을 금지하고, 어린 찻잎을 따서 만든 잎차만을 들이게 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가루차를 마시던 차 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명대 사람들은 찻잎을 찻주전자에 바로 넣고 우린 후, 다시 이를 다종(茶鍾)에 옮겨 마셨는데, 이는 지금의 차 마시는 방법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호(茶壺)와 다종은 주요 다기가 되었고, 다배(茶杯)는 차의 빛깔을 즐길 수 있도록 옥처럼 흰 백자가 사랑받았으나, 청화자기 역시 상당히 유행하였다. 다기의 제작은 도자기에만 제한되지 않았고, 명 말에는 의흥(宜興)의 자사(紫砂)와 주니(朱泥) 다호의 사용이 일종의 풍조가 되었다. 또한 명대 문인들은 차를 즐기는 공간 역시 매우 중요시 여겼다. 이에 본 장에서는 차 애호가이자 대화가(大書畫)였던 문징명(文徵明1470-1559)의 〈품차도(品茶圖)〉를 토대로 명대 다실(茶室)을 재현해보았다. 이를 통해 이 곳을 찾은 이들 역시 명대 사람들이 차를 즐기던 공간과 그 분위기를 만끽해볼 수 있을 것이다.
3.청대의 차 문화
청대와 명대의 차 문화는 크게 다르지 않았고, 강희, 용정, 건륭, 이들 세 황제 때의 청궁은 다기 제작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강희제 때는 서양의 선교사가 들여온 법랑채(琺瑯彩) 기법을 다기 생산에 응용하기도 했으며, 그 밖의 각종 다기의 품질이 모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재료, 조형 및 장식 기법 등 모든면에서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다. 본 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청궁의 다기와 문서 기록을 통해 다기를 향한 황제들의 애정과 기호를 살펴볼 수 있다. 개완(蓋碗)의 보편적인 사용은 청대 차 문화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그 밖에도, 청대 황실에는 중원을 차지한 후에도 여전히 우유차를 마시는 민족적 풍속이 남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몽골 왕족들 및 티벳 승려들을 초대한 연회 자리에서는 우유차를 꼭 대접하였으며, 이는 청 황실이 자주 거행하던 친교 활동이기도 했다. 이에 우유차를 위한 다기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본 박물원은 우유차 다기 중 최고 작품만을 엄선하여 전시하였고, 이를 통해 청대 차 문화의 다원화된 면모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제 2장
다도—일본 차 문화
1.일본의 다도 정신-화경청적(和敬清寂)
8세기 중반, 중국의 차 문화는 견당사(遣唐使) 및 승려들에 의해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졌다. 12세기 말에는 영서선사 (榮西禪師1141-1215)가 남송으로부터 선원(禪院)의 끽다법(喫茶法)과 차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돌아왔고, 이에 일본의 차 마시는 문화 및 찻잎 재배가 매우 성행하게 되었다. 15세기에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36-1490)가 무사, 귀족, 승려 등의 문화를 융합하여, 서원의 다실에서 서원차(書院茶)라는 명칭의 다회를 열었다. 그 후, 무라타 슈코(村田珠光1423-1502)는 옛스럽고 소박한 다실을 열며, 다인(茶人)은 욕망을 버리고, 수행을 통해 다도의 내재된 정신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16세기 말의 센 리큐(千利休1522-1591)는 「화경청적(和敬清寂)」의 다도정신을 제창하며, 중국에서 건너 온 당대(唐代)의 다구는 사용하지 않고, 대신 질박한 다구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며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일식 다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2.전차(煎茶)의 다도
17세기 중엽, 명대의 상인들은 나가사키(長崎)에서 무역 활동을 하였고, 명대 말기에는 차 마시는 방법을 일본에 전하였다. 1654년에는 복건 황벽산(黃蘗山)에 위치한 만복사(萬福寺)의 은원(隱元)스님(1592-1672)이 일본으로 향하였고, 이 때 복건식(福建式) 끽다법과 의흥(宜興)의 다기를 가지고 갔다. 문인들이 아끼는 다기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끽다법의 이 결합은 곧바로 일본 문인들 사이에서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18세기, 바이사오(賣茶翁)라고 불리웠던 코유카이(高遊外1675-1763)는 귀천을 나누지 않고 선속(禪俗)이 융합된 정신을 바탕으로, 여유롭고 자유롭게 차를 마시는 태도를 제창하였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 의해 「전다도(煎茶道)」라고 일컬어졌다. 그 후, 전다도는 문인들의 취향적 영향을 받으며 그림 감상 및 휘호(揮毫)와 결합하였고, 일종의 생활 풍류의 표현 방법이 되었다. 이는 계속 발전하며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차를 우리는 형식과 예의가 엄격한 다도를 형성하게 되었다